2015년 회고

벌써 십수 년째 새해 소망은 같다.

다음 해에는 지난해보다 1g만큼 나은 사람이 된다.

중2병을 심하게 앓던 꼬꼬마 시절부터 아직 완치가 되지 않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어차피 그럴듯한 새해 계획을 세운다고 한들 우주 최고 의지박약인 내가 계획을 실천할 수도 없을뿐더러 게으르고 즉흥적인 녀석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을 미숙하고 불완전한 상태로 살다 죽을 것이다. 아무리 노오력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 이미 결정이 난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보다 뭐라도 하나 나은 사람이 된다면 그것도 나름 사는 재미가 될 테고 대충 적당히 '올해는 작년보다 이거 하나는 나아졌다'고 퉁치면 한 해의 목표를 달성하는 거니까 나만의 성취감(ㅋㅋㅋ)도 느낄 수 있다.


작년 보다 키가 컸다. 작년 보다 칭찬을 더 받았다. 작년 보다 성적이 올랐다. 작년 보다 코드를 더 썼다. 작년 보다 감사 인사를 더 했다. 작년 보다 돈을 더 벌었다. 작년 보다 기부를 더 했다. 작년 보다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누가 보면 웃기지도 않을 소소한 '1g'만큼 나아진 내가 지금 내 모습이다. 


매년 1g씩 나아지긴 했지만 정말 딱 1g만큼이라서 거창하게 글까지 남겨가며 한 해를 회고한 기억은 거의 없는데, 멋지게 2015년을 회고하는 다른 존잘 님들의 글을 읽다 보니 나도 따라 하고 싶었다. ㅡ,.ㅡ 나는 따라쟁이니까.


작년부터 사비를 털어가며 왕성한 대외-_-활동을 하고 있다. 페북에서 말하기를,  올해는 2015년 12월 27일 현재 총 6개국, 19개 도시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파이콘만 다섯 군데, 구글 I/O도 갔었고 떠난 김에 근처를 여행하기도 했고 다른 일(?)로 몰래 미국을 다녀온 적도 있으니 국내 도시 두어 군데가 포함되었다면 얼추 맞는 듯하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돌아다닌 기록이다. 국내외 훌륭한 개발자를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건 굉장한 경험이다. 한번 만나고 잊히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올해는 초반 일복이 터져서 깃헙 Longest streak이 150을 넘었다. 깃헙 이전에는 따로 이런 걸 기록하지 않았지만 실제 데이터를 따져보지 않아도 기록 경신이 확실하다. 지금은 콤보가 끊어진지 좀 됐고, 365를 찍은 분을 보기도 했지만 내 목표는 작년 보다 나아지는 거니까 ;)


99년에 하우투 문서 번역으로 처음 오픈소스에 기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코드 기여를 했다. pandas에 5 커밋. folium에 1커밋. celerybeatredis에 1커밋. 기타 프로젝트에 2커밋. pandas에는 올해만 402커밋을 기여한 분이 있지만 내 목표는 작년 보다 나아지는 거니까 ;) 내년부터는 스스로 pandas 기여에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오픈 프런티어로 활동한다. 내년 목표도 자동으로 달성이 되겠지.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경험을 하기 힘들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올해 새로 경험한 일들이 꽤 있다! 6월부터는 새로운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고 얼마전부터는 (너무 부끄럽지만) 강사질도 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발표도 했다. 무려 3번이나. 너무 바보 같아서 부끄럽지만 앞으로 딱 두 번만 더 해보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변호사도 샀구나. 변호사를 선임하면 귀찮은 일 신경 안 써도 되고 알아서 다 해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다 해주지는 않고 일부만 해주더라. 그래도 나름 좋은 레슨이었다고 생각한다. 맞다! 응급실도 가봤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건 처음은 아니네 -_-a 그래도 정말로 응급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인생 최초의 응급실 경험으로 쳐야겠다. 응급실에 갈 때는 운전하지 말고 택시를 타자. 신호 지키느라, 주차장에서는 장애인 구역 피해서 주차하느라 정말 힘들었다.



애증의 파이콘도 사소한 해프닝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커버하면서 행사를 무사히 성공적으로 치렀다.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셔서 작년 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그리고 더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멋진 분들을 더 많이 알게 된 것도 큰 기쁨이다. 빅팬입니다. 더 친해지고 싶어요. 존경합니다. 저도 어딘가 쓸모가 있을 거예요!





물론 작년보다 못한 것도 많다.

매년 한 권씩 번역을 했었는데 올해는 기한을 넘겨버렸다. ㅠㅠ 죄송합니다. (_ _) 다음 달에는 꼭 끝낼게요!



감사 인사를 많이 못 했다. 어머니께서는 사람 구실하면서 사는 게 제일 힘든 일이라고 하셨는데 전화 한통 하거나 잠깐 시간 내서 얼굴 뵙고 인사하는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소홀히 했는지 마음이 무겁고 죄송하다. 감사 인사뿐만 아니라 오랜 친구들도 먼저 못 챙긴 게 너무 미안하고 창피하다. 요즘 Pay It Forward가 핫하다지만 난 Forward고 Backward고 둘 다 제대로 못했는 걸 ㅠㅠ



작년보다 운동을 덜 했다. 야구를 할 때나 헬스장에서 사료를 퍼먹으며 폭풍 PT를 하던 리즈 시절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자전거는 체인이 풀린 채 방치되어 있고 가뜩이나 실다리 인형 같은 팔뚝과 허벅지는 전보다 더 힘을 잃었다.


베이스도 못 만졌다. ㅠㅠ 1년 동안 단 한 곡의 커버조차 하지 않았다. 프로필 사진을 계속 유지해도 되는 걸까;;;


공부도 소홀했다. 적당히 입으로만 먹고살려고 한다. 이건 좀 심각하다. 부끄러운 줄 모르면 늙은 거라고 하던데 부끄러움의 강도가 예전 같지 않은 걸 보면 꼰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거다!!



그래도 이런저런 일들 더하고 빼면 올해도 1g쯤은 나은 사람이 되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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